[3·1절 특집] 102년 전 그날, 인천 달군 뜨거운 독립 운동 함성
[3·1절 특집] 102년 전 그날, 인천 달군 뜨거운 독립 운동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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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600여명이 만세운동 벌였던 황어장터의 일제시대 모습. 계양구 제공

1919년 3월 1일. 모두가 암흑 속에 숨죽여 살던 그 날.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학생 등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날이다. 태극기와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한반도를 뒤덮으며 독립의 염원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후 인천에선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부터 교회 신도, 상인 등 수많은 인천시민은 만세를 외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중 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굽힘 없이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정신은 지금도 인천 곳곳에 기록으로, 그리고 역사로 남아있다.

 

■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만세운동에 불을 지피다

인천에서는 3월 6일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하면서 만세운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펼쳐진 3·1운동 소식을 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는 3·4학년 학생들이 주도해 휴학을 결정했다. 이에 놀란 교직원들이 경찰에 사실을 알리지만, 동맹 휴학을 주도한 김명진·이만용 지사는 8일 오후 9시께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가위로 전화선을 끊는다. 학교 측과 경찰서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 사실을 안 경찰은 학부형 회의를 소집하곤 급기야 “주동자 25명을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다음날에도 학생 405명 중 85명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김명진 지사는 가택 침입 및 전신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붙잡히지만, 경찰 앞에 당당히 서 “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점도 부끄럽지 않다”고 외친다. 휴학은 10일 가까이 이어지고,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이 활활 타올라 인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10년대 조봉암 등이 독립운동을 벌인 잠두교회에서 신도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화중앙교회 제공

현재 인천창영초는 국가보훈처가 현충 시설로 지정했고, 창영초교 총동창회는 1995년 선배들의 애국심을 기리며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3월 8일에는 오은영·우소식·강봉희 지사 등이 손병희 지사가 발표한 독립선언서와 같은 취지의 문서 약 800장을 인쇄한다. 다음날 새벽, 독립선언서가 곳곳에 뿌려지면서 인천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시작했다. 기독교도와 청년·학생 등 300여명의 시민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짖었다. 인천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경찰은 만국공원 집회를 강제 해산했지만, 같은 날 오후 8시30분께 경인가도 부근에서 50여명의 시민이 또 한 번 ‘독립 만세’를 부른다. 일본 경찰은 그중 1명을 체포한 후에야 군중을 해산시킨다.



■ 강화도·황어장터 대규모 만세운동…인천 3·1운동의 절정

강화도에서는 결사대장 유봉진 지사가 대규모 만세 시위를 이끈다. 그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 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기회를 엿보던 상황이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유봉진 지사는 10일가량 그가 다니던 길직교회의 이진형 목사와 함께 시위 작전을 짰다.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치면서 동참을 호소했다.

옛 잠두교회인 강화중앙교회 모습. 강화중앙교회 제공

그리고 3월 18일 오후 2시께, 강화읍 장터에서는 서서히 모여든 길직교회, 잠두교회 신도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친다. 면 보자기와 종이에 그린 태극기, ‘조선독립’ 글씨를 쓴 깃발을 흔든다. 그 순간 유봉진 지사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백마를 타고 등장해 시위대를 이끌기 시작한다. 행진은 군청과 객사, 향교, 경찰서까지 이어져 1만5천여명으로 시작한 인파가 경찰서 앞에서는 어느새 2만여명에 달했다.

강화도에서는 약 35차례 만세운동이 일어나며 43명이 경찰에 붙잡힌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수다.

특히 3월 24일 오후 2시께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계양구 장기동)에는 심혁성 지사의 주도하에 300여명의 군중과 태극기, 만세 함성이 장터에 울려 퍼진다. 때마침 현장을 지나던 경찰 4명은 이를 보고 심혁성 지사를 주재소로 연행했다. 군중들은 일본 경찰의 뒤를 따르며 심혁성 지사를 놓아 달라고 맹렬히 저항했다. 임성춘 지사 등 주민 600여명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며 경찰의 앞길을 막아섰고, 경찰이 겁을 먹고 한발 물러선 틈을 타 심혁성 지사를 구해낸다. 이에 분노한 일본 경찰은 칼을 빼 들고 군중 속으로 달려들어 이은선 지사를 칼로 찔러 무참히 살해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한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연신 몽둥이질해댔다.

창영초교에 세워진 3·1독립만세 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 경기일보 DB
창영초교에 세워진 3·1독립만세 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 경기일보 DB

이날 심혁성 지사를 비롯한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당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 지사는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도 독립운동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논과 밭 그리고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30년 가까이 돌아다니며 만주 등지에서 애국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은 ‘황어장터 3.1 만세운동 기념탑’으로 세워져 그날의 황어장터에서의 역정을 대변하고 있다.
 

■ 21세 청년들의 목숨 바친 혈투

3월 28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현 중구 용유동)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용유면 군중 150여명은 관청리 광장에 모여 큰 태극기를 중앙에 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선다.

현재 계양구 황어장터 모습. 계양구 제공<br>
현재 계양구 황어장터 모습. 계양구 제공

만세운동 뒤에는 이를 주도한 혈성단(조명원·조종서·문무현·이난의·최봉학 지사)의 역할이 크다. 이들은 앞선 23~24일 조명원 지사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운 상태. 혈성단은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안내문을 제작해 일일이 봉투에 넣어 마을에 배포했다.

혈성단은 남북리와 그 인근 거잠리, 을왕리 등을 다니며 글을 아는 사람에게 안내문을 배포했다. 28일에 관청리 광장에서 군중 150여명이 만세 시위를 했다. 조명원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행진했다. 이 만세운동을 끝으로 혈성단 단원을 포함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이들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명원 지사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조종서·최봉학·문무현 지사 등 나머지 혈성단원은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조명원 지사 등 혈성단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명원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데다, 일제의 감시로 평생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혈성단 지도자들의 평균 나이는 21세에 불과했다. 이 젊은 청년 지도자들의 피·땀 흘린 행진을 기리는 ‘3·1독립만세기념비’는 인천공항 하늘길 바로 아래 솟아있다.
 

인천 3·1운동의 발상지인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실 모습. 인천시교육청화도진도서관 제공<br>
인천 3·1운동의 발상지인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실 모습. 인천시교육청화도진도서관 제공

■ “사활을 건 혁명, 기억하고 보답할 방법 찾아야”

역사가들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다. 독립운동을 이유로 사망한 사람만 7천500여명에 달하고 4만7천여명이 투옥 1만6천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사활을 건 혁명인 셈이다.

이태룡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인천에도 수많은 선조가 3·1혁명으로 나라를 위해 힘썼고 희생당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선조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비밀기록 때문에 이들에 대한 포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넘었다고 해서 선조들의 ‘저항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두 발 뻗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 땅이고 나라”라며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강우진·김보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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